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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있으되 “子曰 ,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논어 위정(爲政)편의 너무나 유명한 대목으로,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본문에 충실하면 다음과 같이 읽힌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나는 열 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확고히 섰으며, 마흔에 의혹을 갖지 않았고, 쉰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에 귀가 순해졌고, 일흔에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내 어린 시절 ‘공자는 위대한 성인(聖人)이시니 삶도 당연히 그러셨겠지…’로 읽혔다. 내 젊은 시절부터 그 동안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득한 거리감에 주로 ‘그런데 나는?...’으로 읽혔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도 읽힌다. “제자 묻기를, 스승님! 사람은 일생을 어떻게 살아야 좋겠는.. 더보기
깨달음의 벗 學而第一 배움이 제일 子曰, 공자 말씀하시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되 때에 맞춰 익히고 이를 행하면 제대로 된 기쁨에 이르지 않을까?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이렇게 되면 곧 깨달음의 벗이 아득한 곳에서 찾아오는 즐거움에 이르지 않을까?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비로소 다른 사람이 덜 알아주더라도 번민 덜 할 테니 참된 사람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논어 첫 문장을 대하니 아득한 학창시절이 새삼 떠오른다. 그 당시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대부분의 해설이 비슷한 것 같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친구가 있어 먼데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 더보기
나이 들어서야 읽어 보는 論語 나이 들어서야 읽어 보는 論語 하루 다섯 번 버스가 지나다니는 강원도 원주의 남쪽 변두리 촌 동네에 묻혀서, 있는 듯 없는 듯 은퇴자(隱退者)의 삶을 살아가는 나. 버스 대 여섯 정류장 거리인 면 소재지에 아주 작지만 매우 큰 『중천철학도서관』이 있다. 우리나라 동양 철학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원주 출신 중천 김충열(中天金忠列, 1931~2008) 선생의 업적을 기려 2015년 10월에 세워졌다. 여러 차례 드나들다 보니 장서(藏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동양 철학 쪽에도 자연히 눈길이 가게 되었다.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古事)처럼 – 비유가 맞는지 모르지만 - 내가 나이 들어 새삼 論語를 읽어 보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공자 말씀대로 하면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