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而第一 배움이 제일
子曰, 공자 말씀하시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되 때에 맞춰 익히고 이를 행하면 제대로 된 기쁨에 이르지 않을까?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이렇게 되면 곧 깨달음의 벗이 아득한 곳에서 찾아오는 즐거움에 이르지 않을까?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비로소 다른 사람이 덜 알아주더라도 번민 덜 할 테니 참된 사람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논어 첫 문장을 대하니 아득한 학창시절이 새삼 떠오른다. 그 당시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대부분의 해설이 비슷한 것 같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친구가 있어 먼데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그 당시 어리고 단순하기만 했던 나는 주로 다음과 같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배운 걸 복습 잘해라!
친구를 잘 사귀라!
그리고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굳세야 남자지!’
그런데 나이 들어 읽다 보니 새삼 이런 생각도 들었다.
삶의 길을 배우는 것도 좋겠지만 이왕 배운 거 자신 여건에 맞추어 가려 익히고 익힌 걸 행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친구를 잘 사귀어 먼데서 친구가 찾아오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배움으로써 아득하기만 했던 깨달음의 벗이 찾아오는 즐거움을 강조한 게 아니었을까?
웬만하면 화내지 않아서 군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배우고 익히고 행하는 가운데 깨달음으로 굳건해진다면 비로소 참된 이에 이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젠 앞보다는 뒤를 자꾸 돌아보게 된 지금의 나. 그간 살아오면서 과연 삶의 도리를 얼마나 배우려고 했고, 그나마 배운 걸 제대로 익혀 실천에 옮기려고 했는가를 생각하면 괜히 얼굴이 붉어진다.
하지만, 요즘 같은 복잡다단(複雜多端)한 세상에 다른 사람에게 이해 받고 인정 받을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렇게 새롭게 눈뜨는 것처럼 작은 깨달음의 벗도 만나서 많이는 말고 조금만 더 즐거워하고 조금만 덜 번민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만으로도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사진출처]http://m.blog.naver.com/vitamintrees/220709841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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