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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랑노래



가난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 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목소리만 높다고 힘있는 시가 아니다. 이 시는 현실에 대응할 때 서정성이 어떻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 名詩로 손꼽혀 왔다. 그러기에 7,80년대 민중시는 물론 60년대 김수영 같은 시인의 참여시 조차도 교과서에 소개될 수 없던 그 시절, 이 시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을 때 - 중학생이 읽기에 무리가 아닐까 하는 염려는 있었지만 적잖은 감격과 흥분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그 당시 교사용 지도서에 실린 해설이 지금까지도 이 시를 다루는 참고서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 시의 주제가 따뜻한 인간애’, ‘인간적 진실의 따뜻함과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정말 이 시의 주제가 노동자의 따뜻한 마음, 인간다운 삶은 포기하지만, 마음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노래한 것일까? 진실로 이 시의 주제가 따뜻한 인간애라면 이 시는 사뭇 부드럽고 따스한 어조로 낭송해야 할 터, 나는 도저히 이 시를 그렇게 읽을 방도가 없다. 특히 점차 고조에 이르는 마지막 부분.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라는 대목은 울부짖듯이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보아도 이 시의 초점은 가난한 노동자의 따스한 마음에 가 닿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 이 현실을 향한 것으로 보아야 옳기 때문이다. 즉 이 시의 주제는 가난한 이 혹은 노동자로 하여금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우리 현실에 대한 분노와 자조라고 말하는 편이 에누리 없는 진실이라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랑노래>는 우리에게 그 불평등의 기원이 결코 당연하거나 자연적인 것만은 아님을, 그것은 사회적 기원을 지니고 있는, 다시 말해 우리 사회가 노력하면 바로잡을 수 있는 그런 것임을 절절하게 들려주는 셈이다.


 

한 남녀가 헤어진다. 그들이 왜 헤어지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이 시 한편에 담긴 그 스토리를 짐작할 수는 있다. 그토록 뜨거운 입술과 그렇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 숨결의 소유자가 어찌하여 등 뒤에서 울음을 터뜨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사랑이 변해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여전하다. 여전한 정도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 헤어질 만큼 그들은 사랑한다. 헤어져야 할 만큼 가난하기 때문이다. 가난하기에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목하라. 이 시에서 먼저 이별을 고한 이는 여인이 아니라 청년이다. 가난한 그가,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를 리 없는 그가, 먼저 그녀에게 헤어지자 하는 것이다. 그녀도 가난한지 아닌지는 큰 상관이 없다. 어느 쪽이든 우리에겐 미래가 없노라고, 이 사랑의 결말은 처음부터 이렇게 정해져 있었노라고, 그 동안 버티고 버텨 왔지만 이제 때가 왔노라고, 가난한 자기가 먼저 이를 악물고 이별의 말을 건넨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뜨거운 입술로, 가쁜 숨결로,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애절하게 그를 막아 본다. 그러나 끝내 그는 돌아서야만 했다. 등 뒤에서 터지던 그녀의 울음을 짐짓 모른 척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애써 옮겼을 것이다. 이 시는 그렇게 헤어져 돌아온 길,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 눈 쌓인 골목길에서 시작한 것이다.


떠난 건 청년이었고 떠나 보내야 했던 건 여인이었지만, 어차피 떠날, 떠나야 할 사람은 그녀였음을, 그들도 그리고 우리도 안다. 그가 낭만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 역시 외로움, 그리움, 두려움 그리고 사랑을 다 아는 자이다. 하지만 가난은 사람을 일찍 철들게 한다. 그는 이미 안다. 가난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체념하고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은 초연이나 초월, 초탈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익숙할 뿐이다. 삶은 그에게 집착은 상처만 남긴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다고 슬프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알기에 더 슬플 수도 있다. 슬퍼도 슬퍼할 겨를이나 여유가 그에게는 없을 따름이다.


 

가난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생각해 보라. ‘사랑을 숨기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순수하고 애틋한 일 인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사랑은 표가 난다. 들키지 않는 짝사랑은 아무나 수행할 수 없는 고도의 경지다. 하지만 가난에 주목해 보았는가? 가난은 못 감춘다는 사실. 얼마나 절망적인가? 어쩌다 무리를 해서 새 옷으로 가려도 가난은 드러난다니


그러면 가난사랑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가난도 못 숨기고 사랑도 못 숨긴다. 가난도 못 참고 사랑도 못 참는다. 그런데 가난을 못 숨기기 때문에 사랑을 참아야 한다. 사랑을 못 숨기기 때문에 가난 따위야 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것을 숨길 수 없기에 결국 사랑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랑노래>는 그 성찰과 체념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위안을 주는가?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긍정과 초월의 덕목과, 정의와 진리와 갈등과 비판과 투쟁의 가치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취해야 하는가? 가난한 갈대들의 사랑 노래는 지상에서 결코 들을 수 없는 천상의 노래로 머물러야 하는가?

 

정재찬 시를 잊은 그대에게 -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중에서


 

  나도 詩에 참고서식 시시콜콜한 해설을 붙인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많은 경우 남이 내가 느낄 것까지 천편일률 적으로 강요한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필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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