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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우주, 그리고 극소수의 생명체

『별들이 태어나는 그곳, 웨스터룬드 2 – 나사의 허블 우주망원경 발사 25주년 기념 사진, 2015 

(Cluster and Starforming Region, Westerlund 2 – NASA Hubble’s 25th anniversary image, 2015)


현재까지 인간이 발견한 지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은하는 2016 3월 허블 우주망원경으로 큰곰자리 방향에서 발견한 GN-z11’이다. 이 은하는 지구로부터 약 134억 광년 정도 떨어져 있다. 이 은하는 별들이 점점이 찍혀있는 머나먼 우주의 밤하늘 속에서 희미한 붉은 점으로 보인다. 이 은하의 색이 붉은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 빛이 백 수십 억 광년 동안 우주공간을 여행하는 동안에 파장이 점점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은하의 실제 색깔은 젊고 뜨거운 항성의 색깔인 파란색이다. 그리고 이 은하의 크기는 우리 은하보다 25배나 작다. GN-z11’는 우리 우주에 형성된 초기 은하 중 하나 이다.

 


『은하 GN-z11

[사진출처] http://www.spacetelescope.org/images/heic1604b/
 

  우리 우주가 팽창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밀도는 희박해지고 온도는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팽창의 속도를 측정하면 우리 우주의 팽창이 처음 시작되었던 과거의 순간, 즉 빅뱅이 일어났던 때를 꽤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 실제로 추정해보면 약 137억년 전이라는 값이 나온다. 이때는 현재의 우리 우주가 있는 공간에 아무런 행성, 항성, 은하계도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 우주 전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밀도인 에너지 덩어리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빛을 관측하는 아무리 크고 정밀한 망원경을 만들어낸다 한들, 우리 우주의 시작인 빅뱅 이후로 빛이 이동한 거리 너머의 우주는 볼 수 없다. 그보다 먼 거리의 경우에는 우주의 탄생 이후로 빛이 그곳에서 지구까지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최대거리를 반지름으로 하는 거대한 구체가 바로 관측 가능한 우주(Observable Universe)’이다. (관측 가능한 우주는 하루하루 조금씩 커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우주는 그보다 훨씬 먼 곳까지 펼쳐져 있을지 모른다.



『관측 가능한 우주(Observable Universe)

[사진출처] http://quantumartandpoetry.blogspot.kr/2013_08_01_archive.html

 

무지개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어머니 대자연(Mother Nature)’이라는 개념은 지구의 모든 문화권에 등장한다. 하지만 과거 우리 조상들이 상상했던 그 무엇과도 비교가 안될 만큼 어마어마하게 커진 새로운 우주 가운데 대체 어디까지가 이런 어머니 대자연의 일부일까? 그 빛이 우리 눈에 도달하는 데만 백 수십 억 년이 걸리는 은하계와 항성들이 존재하니 말이다. 저 우주지도에 무수히 찍힌 점들이 과연 윌리엄 워즈워스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묘사했던 자연 풍경의 일부일까? 이 점들 역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산이나 나무 같은 자연일까? 이 점들은 과연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주기의 일부일까? 우리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물리적, 정서적 개념 속에는 과연 이런 점들도 포함되어 있을까? 아니면 혹시 이런 것들은 가설에 따라 우리와는 원자와 분자의 구성요소만 비슷할 뿐, 소리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는 디지털화된 추상적 개념에 불과할까? 수십억 개의 항성 중 하나, 그리고 그 주변을 돌고 있는 한 작은 행성 위에 살고 있는 우리 인류는 이 점들과 어디까지 같은 대자연의 일부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학은 우리 우주의 규모를 거대하게 확장시켰지만, 우리의 정서적 실재(Emotional Reality)는 여전히 우리가 한평생 육체를 통해 접촉할 수 있는 내용에 국한되어 있다. 18세기 아일랜드의 철학자 버클리 주교는 우주 전체가 우리 마음이 빚어낸 구성물이며, 우리의 생각 외부에는 어떤 물질적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나는 그런 믿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정서적, 심리적 수준에서는 버클리 주교의 관점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다. 현대과학은 시각장애인에게 색의 의미를 밝히는 것처럼 우리 육신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세계를 밝히고 있다.


우주비행선 케플러호의 예술적 개념도(Artist's rendition of Kepler spacecraft)

[사진출처] http://kepler.nasa.gov/multimedia/artwork/artistsconcepts/?ImageID=23 


아주 최근의 과학적 발견은 우주에서 우리 위치에 대해 또 다른 차원의 질문을 덧붙였다. 과학 역사상 처음으로 우주에 생명이 발생할 비율을 그럴듯하게 추론한 것이다. 2009 3월에 NASA에서 우주비행선 케플러호를 발사했다. 케플러호의 임무는 다른 항성의 생명체 거주 가능 지역을 돌고 있는 행성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생명체 거주 가능 지역이란 물이 얼 정도로 춥지 않고, 물이 끓을 정도로 뜨겁지도 않은 지역을 말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생물학자와 화학자들은 생명이 탄생하려면 액체 상태의 물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우리 지구의 생명체와 아주 다른 형태의 생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 조건을 갖춘 수십 개의 후보 행성이 발견되었고, 대략 전체 항성 중 3퍼센트 정도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는 예비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 식물, 세균, 녹조류까지 다 포함해서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구성하는 물질을 합치면, 지구 질량의 대략 0.00000001퍼센트를 차지한다.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에는 실제로 모두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이 수치를 케플러호에서 얻은 결과와 결합해 보면, 가시적 우주에 생명체 형태로 존재하는 물질의 비율은 대략 0.000000000000001퍼센트, 100만 분의 1 10억 분의 1 정도다. 만약 어떤 우주적 지능이 이 우주를 창조한 것이라면, 생명체는 그저 머릿속에 떠올라 덧붙여놓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만약 생명이 임의의 과정을 통해 등장한 것이라면, 생명을 구성하는 입자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 엄청난 양의 생명 없는 물질이 필요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우주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엘런 라이트먼 著

『엑시덴탈 유니버스(The Accidental Universe) –우리가 몰랐던 삶을 움직이는 모든 순간의 우주』 중에서

 

 

***


 

물질의 비율만으로 비교하면 우주 전체에서 생명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비록 미미하지만, 무질서로 향해가는 우주에서 우리 생명체가 추구하는 질서는 그만큼 소중한 게 아닐까?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1887-1961, 193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1943년 더블린에서 했던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생명의 가장 핵심은 새로운 차원의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물질대사와 재생산을 함께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우주의 다른 어느 것보다 더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생명체가 성취한 질서의 수준은 우주가 무질서를 향해 간다는 일반적인 경향에 비추어볼 때 대단히 경이로운 것이다. 생명체의 생애 주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무생물들이 결코 보여주지 못하는 경탄할 만한 규칙성과 질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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