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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는 삶에 관한 어떤 생각들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물속에서 헤엄치다 나이 든 물고기와 마주칩니다. 그가 어린 물고기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좋은 아침이야! 얘들아. 물은 좀 어때?” 말없이 헤엄쳐가던 어린 물고기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에게 묻습니다. “? 도대체 물이 뭐야?”


이들 물고기의 일화는 명백하고 당연한 현실일수록 오히려 인지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부하고 뻔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크게 다르지 않은 우리들의 일상에서는 이런 진부함과 뻔함이 삶을 가르는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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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부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알래스카의 외딴 숲 술집, 유신론자와 무신론자가 술에 취해 신의 존재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무신론자가 말했습니다.

나도 시도를 아예 안 해본 건 아니라네. 기도도 해봤고 신을 믿으려고도 해봤지. 바로 저번 달엔 심한 눈보라에 길을 잃고 거의 죽을 뻔 했었지. 그때 무릎을 꿇고 빌었네. 날 여기서 살려준다면 신의 존재를 믿겠다고.”

유신론자가 물었습니다.

이해가 안 가네. 지금 이렇게 살아있으니 자네는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네. 신이 아닌 그때 마침 길을 지나가던 에스키모 인들이 날 구해준 것뿐 이라네.”


무신론자는 도움을 청한 자신의 기도와 에스키모인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한 채, 확신에 차서 이것이 신의 개입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자기의 해석만이 옳다고 확신하는 유신론자들도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이들이 무신론자들보다도 더 맹목적인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상 유신론 독단주의자의 문제는 앞의 일화 속 무신론자의 문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 교만과 맹목적 확신, 그리고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폐쇄된 감옥처럼 꽉 닫혀있는 마음 말입니다.


나는 이것이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는 인문학 교육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덜 교만해지고, 자기자신과 자기 확신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더 소유하도록 하는 것 말입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확신하기 쉬운 것들이, 사실은 대체로 잘못 알고 있거나 착각하고 있었다는 결과로 나타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학교를 졸업한 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나는 조금씩 어째서 교육과 배움이 운명을 좌우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인문학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배운다라는 상투적인 문구가 사실은 깊고 중요한 진실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온전한 정신상태에서 자신이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는 대상을 선택하며, 체험을 통해 의미를 구성하는 방법을 자기가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어른이 되어서 이런 종류의 선택을 하지 않거나 선택을 할 줄 모른다면 자칫 인생은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

여기 약간은 이상한 진실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이 세상에 무신론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숭배할지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을 뿐, 아무것도 숭배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올바른 종교관을 가지는 게 가장 나은 형태의 숭배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외 다른 것들을 숭배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불행해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물를 숭배한다면 - 많은 부를 쌓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다면 - 충분히 소유했다는 충족감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외모와 미모, 성적인 매력을 숭배한다면 죽을 때까지도 스스로 아름답다고 만족하지 못 할 것입니다.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날 때마다 실제로 땅속에 묻히기도 전에 수없이 좌절과 죽음을 미리 체감하며 살아가겠지요.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속담, 우화, 신화를 통해 익히 들어온 진부한 교훈이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진부한 교훈을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인지하고 기억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힘을 숭배하는 사람은 남보다 강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합니다. 그게 오히려 내면의 두려움을 키운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로요.

지성과 똑똑해 보이는 것을 숭배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아는 체를 합니다. 결국 잘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리죠.

문제는 이런 자기중심적 숭배가 무의식적으로 진행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숭배는, 도덕적인 옳고 그름을 떠나, 자기 자신에게 매우 해롭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지배하는 기본 설정 값이 되어 나의 시각을 편협하게 만들고 나의 가치관을 고정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현실 세상은, 오직 나만이 옳고 우주의 중심이라는 기본 설정 값을 따르려는 인간의 타고난 성향을 고쳐주지 않을 겁니다. 인간의 역사는 보다 많은 부와 편리함,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습니다. 내 마음 속의 절대 권력자가 되어 내 생각대로 내 욕구를 추구할 자유 말입니다.

이런 자유가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다른 형태의 자유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중하지만 그만큼 얻기 어려운 자유. 개인적인 욕구와 성취를 최우선시하는 이 현실 세계에서 자주 강조되지 않는 자유. 무엇을 배려하고, 상황을 어떻게 자각할 것이며, 어떤 생각을 할지 선택할 자유. 타인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사소하지만 절대 특출 나지 않은 방법으로 나 자신을 희생할 자유. 이런 것들이 진정한 자유이고 진정한 배움입니다.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기본 설정 값에 종속되어 무의식적인 삶을 살고, 무의미한 경쟁을 하고, 무언가를 소유했다가 잃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삶 입니다.

...


     ♤♤♤♤

이제까지 제가 말하고자 한 것은 당연히 죽음 전의 삶에 관한 것 입니다.

삶에서 필요한 교육과 배움의 진가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지요. 성적이라든가 학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다만 깨어있는 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현실이고 근본적인, 우리 주위 훤히 보이는 곳에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잘 보지 못하는 숨어있는 현실, 매일 끊임없이 그 존재를 깨우쳐주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현실, 그런 현실을 알고 살아가자고 하는 각성(覺醒)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상기시켜줘야 합니다:

이것은 물이다” “이것은 물이다 라고.

그 에스키모 인들은 사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라고.

 

지각 있게, 어른스럽게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배움은 평생 끝나지 않는 직업과도 같다라는 말이 있나 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진짜 배움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에게 행운 그 이상을 바랍니다.

 

『이것은 물이다』, 깨어있는 삶에 관한 어떤 생각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 1962 - 2008) 2005 5월 미국 케니언대학 졸업식에서 한 강연 중에서 일부 발췌 정리함


 

 

살아가며 매 순간 할 수밖에 없는 생각과 선택의 방향에 대하여, 인문(人文)과 인문학(人文學)의 가치에 대하여, 그 가르침과 배움의 방향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갖게 해준 글이다.

 

철학자 최진석 서강대 교수의 저서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 따르면      

()이란 원래 무늬란 뜻으로, 인문(人文)이란 인간의 무늬를 말하며, 따라서 인문학이란 고매한 이론이나 고급한 교양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도구로서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는 바 그 뜻이 좀더 와 닿는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인문학의 주된 영어 표기는 인간성에 주안점을 둔 Humanities 이지만, 또 다른 표기는 Liberal Arts(自由科, 라틴어 Artes Liberales)라고 한다. Liberal Arts로 표기되는 그 근원은 인류 최초로 민주주의가 만들어진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들이 권력에 맞서 주권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 노예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 토론과 배움을 통해 인문학을 꾸준하게 발전 시킨 데 있다고 한다.

 

작금의 우리나라 현실을 볼 때, 주권자인 우리 국민들이 자칫하면 잘못으로 빠져들기 쉬운 권력에 맞서 주권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더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한편,

인문학이 인간 중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과 인간을 동등한 시각에서 함께 아우르는 포용력을 가질 때 현대문명의 미래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주제 넘은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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