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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위안



오늘날의 죽음은 얼마나 소란스러운가? 더 오래 살아야겠다는 욕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또 다시 살아야겠다는 욕망을 부채질한다.

 

잘 먹고 잘 살기는 더불어 잘 먹고 잘 살기가 아니라, 나만 더 오래 살고 나만 더 잘 살고 싶은 탐욕으로 변질된다. 건강식품, 건강 프로그램이 넘쳐날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 늘어 대학 병원은 늘 만원을 이루며 성업 중이다. 줄기세포 연구는 진시황이나 파라오 때부터 인간의 오랜 꿈이었던 불멸의 삶을 곧 보장해줄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그뿐인가? 세상에 죽음이 넘치는 만큼 교회도 넘치고, 영생의 약속은 부도수표처럼 남발된다.

 

삶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일면 생명연장의 꿈을 실현해 주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해졌으며 평균 수명 역시 그 어느 시대보다 길어졌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행복한가? 고요하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노년 이 속에는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이 다 들어간다 을 보내고 있고, 감옥이나 다름없는 요양원이나 병원에서 소외되고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외롭고 억울한 죽음은 또 얼마나 많은가! 비참하고 보잘것없는 죽음이 미래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 지상에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행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 순간이 생의 따뜻한 위로처럼 다가오기를 바랄 것이다. 삶이라는 하나의 여행을 끝내고 또 다른 여행을 떠나는 사람. 그게 우리가 꿈꾸는 죽음이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는가?

 

죽음은 빛이 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새벽이 밝아오기에 램프를 끄는 것과 같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누런 모래가 하늘 높이 회오리를 만들었다. 그때 내 눈에 무언가가 펄럭이는 게 보였다. 작은 봉분 위에 얼키설키 세워놓은 깃발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둔황은 사막 위에 떠있는 섬과 같은 곳이다. 무덤은 정해진 위치가 있는 곳이 아니어서 사막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는데, 바람에 날려가고 나면 그 위에 누군가가 다시 무덤을 쓰곤 한다고얼마나 많은 세월, 얼마나 많은 무덤들이 세워졌다 사라지곤 했을 것인가?

바람과 시간의 여울 속에 누군가의 흔적이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풍경을 보며,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던 죽음에 대한 어떤 강박관념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죽음이란 것, 어쩌면 저렇게 별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의 삶이 별게 아니듯이….

 

 만일 우리에게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죽음이 없는 삶이란 종착지 없는 마라톤이다.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지옥과 같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마라톤에는 반드시 종착역이 있다.

 

몇 년 전 작고하신 박완서 선생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수필이 있다.

선생이 시내에 나갔다가 차가 막혀 웬일인가 하고 봤더니, 마침 마라톤 대회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고. … 선두 주자들은 이미 지나가 버리고 맨 후위 그룹의 선수들이 힘겹게 뛰는 중이었고. 이윽고 거의 꼴찌 가까이 다 지친 선수가 나타났고.…

 

최선을 다하여 달리는 꼴찌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어찌 박완서 선생뿐이겠는가?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1등만을 고집하고 기억한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시작된 1등 최고의 교육은 죽을 때 까지도 계속된다. 1등짜리가 아닌 인간들의 죽음은 그냥 지나갈 뿐이고, 기억은 고사하고 멸시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1등도 2등도 꼴찌도 없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인생을 자기 식으로 살아왔고 살아갈 뿐이다. 나의 인생과 비교할 수 있는 인생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 광막한 우주 속의 나의 존재는 위대하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다. 단지 각기 자신의 운명 하나씩을 떠안은 채 살다 갈 뿐이다.…

 

우리 인생에 완주는 없다.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하면 모두가 자기 인생을 자기 식대로 완주했다고 할 수도 있다. 살아온 나이가 그것을 결정해주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 왔다면 그것이 완주이다. 그렇게 자기 인생을 완주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정한 어머니 얼굴을 한 죽음이다. 어머니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아들아, 딸아, 수고했구나. 힘들었지? 이제 편히 쉬어라.”

 

죽음은 우리가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묻지 않는다. 잘 살았든 못 살았든, 더없이 행복했든 더없이 불행했든 묻지 않는다. 아무리 잘 살았고, 행복하게 살았다 해도 생은 그 자체가 무거운 짐이었을 것이다. 죽음은 어머니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 모든 짐을 내려놓게 한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도달한 곳은 생의 덧없음이요, 생에 대한 겸손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여행하고 와서 내내 내 마음 속에 떠오르던 말도 바로 생에 대한 겸손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 속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고, 천산의 호수 가에 앉아서 광대한 우주의 모래알처럼 많은 별들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의 불행, 나의 아픔, 나의 고통은 그저 번개처럼 지나가는 찰나의 빛일 뿐이었다.

 

 죽으면 우리의 육신은 분해되어 다시 자연계인 우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렇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그것보다 더 자명한 사실은 없다. 그것은 두려운 것도 공포스러운 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우리 삶의 한 과정일 뿐이다. 나아가서 그런 소멸이야 말로 우리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신의 축복이며, 위안일지도 모른다. 소멸이 없다면 이 살아있음조차 무엇이 귀할 것인가? 어쩔 수 없는 것 앞에 우리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선인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가르침도 그런 것이리라.

 

 지금도 나는 몸이 몹시 아프거나 힘들 때면 그때 지나갔던 그 사막 길을 떠올린다. 군데군데 보이던 이름없는 마을과 마을 어귀에 피어있던 접시꽃…. 그리고 일찍이 누군가의 육신이었을 흔적들을…. 그러면 나는 편안하게 숨을 들이킬 수 있다.

 

 죽고 난 다음에 나의 영혼은 어디로 갈까? 그런 것이 과연 있을까? 그 대답은 당신의 믿음이 해 줄 것이다. 아마도 당신의 믿음대로 될 것이다.

 

소설가 김영현의 산문집 『죽음에 관한 유쾌한 명상』 - ‘서문생의 위안중에서

 

 

 다들 그렇겠지만 아내도 죽음에 관심이 많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죽음을 통해 바라보는 삶에 관심이 많다. 죽음 이후는 우리가 관심을 갖는다고 쉽게 알아지는 세계가 아니므로아내는 은퇴 후 활동을 염두에 두고 시간을 쪼개어 종교단체에서 호스피스 교육을 받고 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호스피스(Hospice)는 죽음이 가까워 온 환자에게 목숨연명술 대신 평안한 임종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를 돕는 봉사활동으로, 죽음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 중 하나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환자의 고통 완화를 돕는 활동이라고 한다.

 나는 도서관에 가면 관련 책들을 한 두 권 빌려다 아내에게 건네준다. 내가 읽기도 하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내는 어쩔 수 없는 그 때가 오면 구차한 목숨연명술은 하지 않길 원하니 그리해달라고 했고, 나도 그 때가 오면 그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는 화장을 해서 마음에 드는 곳에 뿌리는 산골장(散骨葬)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고, 함께 생각해 보자고 했다. 

사실 다니다 보면, 죽어서라도 소박하고 순수해지고자 하는 이들의 염원에서 벗어나, 남겨진 이들의 애달픈 미련(未練)을 자극해서 화려하고 거창하게 치장해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공원묘지나 납골당 관련업체들이 여럿 있는 것도 현실이다. 죽음 앞에서만이라도 소박해졌으면 좋겠다.

 

일전에『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편에 인용했었던 스코트 니어링의 주위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 을 다시 읽어본다. 나는 어떤 말을 남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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