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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오늘날의 피로사회는 시간 자체를 인질로 잡고 있다.

이 사회는 시간을 일에 묶어두고, 시간을 곧 일의 시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일의 시간은 향기가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일의 시간 외에 다른 시간이 별로 없다. 쉬는 시간도 다른 시간이 아니다. 쉬는 시간은 그저 일의 시간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 일의 시간은 오늘날 시간 대부분을 잠식해버렸다. 우리는 휴가 때뿐만 아니라 잠잘 때에도 일의 시간을 데리고 간다. 그래서 우리는 잠자리가 그토록 편치 않은 것이다. 지쳐버린 우리는 그렇게 잠이 든다. …

 

 오늘날 필요한 것은 다른 시간, 강제에 의한 일의 시간이 아닌 새로운 시간을 생성하는 시간의 혁명이다. 시간에 향기를 되돌려주는 시간 혁명.

 


우리는 잠잘 곳이 있네. 아이도 하나 있네.

내 아내!

우리는 일도 있네, 심지어 둘이서.

또 햇빛도 비도 바람도 있네.

다만 사소한 게 하나 없으니,

새들처럼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 없네.

-리하르트 데멜, 『일하는 사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로운 인간이 따르는 삶의 양식을 세가지로 구별한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 아름답고 고귀한 업적을 이룩하는 삶, 그리고 진리의 사색적 고찰에 헌신하는 삶이다. 이 세 가지 삶은 필요에 의해 강제적이지 않고 자유롭다. 돈벌이를 좇는 삶은 강제된 삶이기에 제외된다. …

 

  위의 자유로운 인간의 세가지 삶 중 최고의 행복은 아름다움과 함께 사색에 잠겨 머무르는 데서 생겨난다. 사색의 시간 감각은 지속이다. 영속적이고 변함 없는 사물, 완전히 자기 안에 고요히 있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 미덕도 지혜도 아니고, 오직 진리에 대한 사색적 헌신이야 말로 인간을 신의 곁으로 데려간다. … 

 

 오늘날 소비사회의 여가문화는 특수한 시간적 양상을 나타낸다.

대대적인 생산성의 증가 덕택에 남아돌아가게 된 시간은 즉흥적이고 남는 것 없는 휘발성 사건과 체험으로 채워지고 있다. 시간을 지속적으로 묶어주는 것이 없는 까닭에 시간이 매우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은 인상, 모든 것이 가속화되는 듯한 인상이 생겨난다. 소비와 지속성은 상반되어 있다. 소비재는 지속을 알지 못한다. … 성장해야 한다는 자본주의 지상명령에 따라 사물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생산되고 소비되기에 이른다. 경제 성장은 사물의 빠른 소모와 소비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소비사회에서 사람들은 머물러 있는 법을 잊어버린다.

소비하는 물건들은 사색적 머무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물건들은 최대한 빨리 소비되고 소모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제품, 새로운 수요를 위한 자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사색적 머무름은 지속되는 사물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소비의 강요는 지속성을 가로막는다.

 

 이른바 느리게 살기도 지속성을 정립하지는 못한다. 소비 태도로 본다면 슬로푸드패스트푸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사물이 소모되기는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속도를 줄이는 것 만으로 사물의 존재를 탈바꿈시키지는 못한다.

 

진짜 문제는 지속되는 것, 긴 것, 느린 것이 멸종의 위기에 처해 삶에서 제거되어가고 있다는데 있다. 사색하는 삶은 머뭇거림  느긋함  수줍음  기다림  자제처럼 하이데거가 지적한 오직 일만 하는 어리석음에 반대되는 존재 양식이다.  이들은 지속성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강제에 의한 노동의 시간은 지속성이 없다. 그것은 생산하면서 시간을 소모한다. 반면 긴 것, 느린 것은 소모와 소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며, 지속성을 갖는다.

사색하는 삶은 지속성의 실천이다. 그것은 강제에 의한 노동의 시간을 억제시킴으로써 다른 시간을 정립한다. …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사색하는 삶은 인간을 더욱 완전하게 만든다.

사색하는 삶 속에서 추구되는 진리의 사색은 곧 인간의 완성을 이루는 것과 같다.”

모든 사색하는 계기가 사라진다면, 삶은 일로,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행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사색하는 머무름은 강제적인 노동의 시간을 멈추게 한다. …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생각 없이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 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하며 사색하는 삶을 강화하는 것은 절실하게 이루어져야 할 인류 문명의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한병철 저 『시간의 향기』 중에서

 

 

 

대체로 시간에는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이 있는 듯하다.

 

물리적 시간의 경우,

조선시대 우리조상들이 사용하던 시간의 기본단위는 각()으로 약 15분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시간의 기본단위는 초(, Second)이나, 비약적인 기술의 진보로 더 세분화할 필요가 대두되어 밀리 초(1/1000), 마이크로초(1/1000,000), 나노초(1/1,000,000,000), 피코초(/1,000,000,000,000), 펨토초(1/1,000,000,000,000,000)로 나누어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을 아무리 잘게 쪼개어 본들 시간 그 자체는 결코 늘어나지 않고 그대로이니, 현대인들이 얼마나 허둥대며 바쁘게 쪼개어 살아내고 있는지 실감이 간다.

 

심리적 시간의 경우,

같은 물리적 시간이라도 개개인이 느끼는 길고 짧음은 즐거움과 지루함의 차이인 듯하다.

20세기 서양연극사를 대표하는 희곡작가이자 연출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독일, 1898-1956)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것이 예술이 아니고, 누가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판가름할 가장 확실한 징표는 지겨움이다. 지겨움이란 즐거움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할 때와 좋아하지는 않지만 필요에 의해 할 때의 차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다양한 일거리와 직업들이 생겨나지만, 현실에서의 문제는 우리가 사랑하고 행복해하고 그래서 매일 매일이 설레는 그런 일거리를 직업으로 삼기가 점점 더 어렵다는 점일 것이다. 그 주된 이유는 좋아하는 일보다는 돈이 되는 일, 행복한 일 보다는 남보다 빨리 우위에 설 수 있는 일을 선택해서 매일 매일을 참고 견디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게 하는 우리시대 사회풍조 때문인 듯 도하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은퇴해서 일을 손에서 놓게 되면 그토록 중요했던 것들이 대부분 사라진다. 이익도 지위도 명예도 일로 맺어졌던 인간관계도 소실되고 오직 경험만 남는다. 찾기 어려울수록 사랑하고 행복해하며 그래서 매일매일이 설레는 그런 일을 찾아서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순간과 영원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한다.

예전의 나는 영원(永遠)’이라는 말이 존재할 뿐, 실제로는 영원한 사랑이니 영원한 행복이니 하는 말들은 상투적인 수사(修辭)에 불과하다고 여겼었다. 영원을 물리적 시간개념으로만 바라봤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결코 상투적인 말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심리적 시간개념으로 바라보면 만약 무한한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에게는 한 사람의 일생과 그 사람이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한 순간은 대동소이한 차이일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영원이라고 한다면, 각인된 진실의 순간과 일생의 영원은 결국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나아가 순간의 머무름 속에 영원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각인된 진실한 시간이기만 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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