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길에 이렇게 많은 짐이 필요할까?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걷기 위해 짐을 꾸렸다. 한 달간 홀로 800KM를 걸어야 하는 여정이다 보니 준비해야 할 것이 꽤 많았다. 여행 사흘 전, 추리고 추려낸 짐을 꾸려 무게를 달아보니 28KG에 달했다. 무게를 덜어볼 요량으로 여행용품을 펼쳐놓고 몇 번을 살펴봐도 모두가 요긴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여행용품 전문점에 들러 5KG을 줄이는 데 80만원이 들었다. 장비가 가벼울수록 비싸기 때문이다.
그렇게 23KG으로 줄어든 배낭을 메고 산티아고로 갔건만, 사흘째가 되자 여행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배낭 무게가 엄청나게 압박을 가해 왔다. 그날부터 나는 ‘버리기’를 시작했다. 한 주 동안 3KG을 버렸고, 그 다음 주에는 별로 무게가 나가지 않는 슬리퍼까지 버려 2KG을 더 줄였다. 치약, 샴푸, 로션은 필요한 예상치만 남겼고 수건과 속옷도 한두 장씩으로 줄였다. 그러고도 15KG이 넘었다.
산티아고 순례 길에는 인생의 여러 담론이 차고 넘친다. 홀로 걸으면 속으로 기어들어간 관념이 마음을 휘저어 여행길을 가렸고 자주 외로웠다. 이웃을 동반하면 외롭진 않았으나 발걸음이 때로 산보마냥 느려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따로 또 같이’를 반복하며 나는 내 나름대로 리듬을 찾았고 여정은 슬슬 제 맛을 내기 시작했다.
긴 여정을 처음 겪은 탓인지 아니면 여전히 무거운 배낭 탓인지 여행 중에 발톱이 세 개나 빠졌고 발 뼈에 여러 군데 실금이 가서 오랫동안 고생했다. 그래도 결국 산티아고에 도착했고, 사흘을 더 걸어 ‘세상의 끝’이라는 피스테라로 갔다.
거기서 귀국을 준비하며 배낭을 풀었는데 맙소사, 거의 쓰지 않은 물품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딱 한번 쓴 판초우의, 버리지 못해 끝까지 지고 간 바람막이 재킷, 막연한 불안으로 준비한 상비약, 찌그러진 초코바, 80여장 밖에 찍지 않은 카메라, 몇 번 펼쳐보지 않은 안내책자, 양말 한 켤레…., 그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남들의 경험담에 묻어간 짐들이다.
목적지에서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을 출발점에 알았더라면 그토록 무거운 짐을 지고 여정을 시작하지는 않았으리라. 문득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생의 마지막에 느낄 절실한 가치와 삶의 목적을 지금 안다면 내 삶이 달라지지 않을까? 이 질문을 안고 나는 호스피스를 찾았다.
내가 촬영한 포천 모현 호스피스는 이 질문이 일상적으로 묻어나는 곳이다. 환자들이 호스피스에 머무는 기간은 평균 21일에 불과하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은 누구보다 진실했고 자신의 삶을 명징하게 바라보았다.
촬영 기간 동안 여든 명 정도가 다른 세상으로 긴 여행을 떠났고, 그 사이 많은 사람을 인터뷰했지만 영화 <목숨>에는 말기 암 환자 네 명만 나온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오랜 기간 가난과 싸우며 가정을 지켜내고자 젊은 날을 바친 오십 대 주부 김정자님. 그녀는 10년 만에 새집을 장만했으나 담도암 판정을 받아 겨우 한 달을 살고 호스피스에 왔다.
박명수님은 사십 대 중반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호스피스를 찾았다. 평생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그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며 어느 정도 죽음에 단련 되었지만 아내 그리고 두 아이와의 이별 앞에서 굳건한 의지는 흔들린다.
전직 수학교사 박진우 님은 일흔다섯 살로 췌장암을 앓았다. 마음만은 그 어던 청춘도 부럽지 않았던 그는 마지막까지 사나이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외로움과 싸우다 마음이 죽어 몸도 함께 죽어가던 신창렬 님은 호스피스에서 작은 기적을 이룬다.
다들 인생의 종착역에서 다음 여정을 기다리는 상황이었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는 사뭇 다양했다. 그들의 마지막이 우리에게 묻는다.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
…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의 인생길에 그토록 많은 짐이 필요할까? 삶의 끝에 도달했을 때 꼭 필요한 무언가가 지금 우리가 쫓고 있는 그것일까?
…
다큐멘터리 영화 <목숨(2014)>의 이창재 감독이 쓴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 서문 중에서
얼마 전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목숨>을 보게 되었다. 평소 TV로 유료 영화를 보는 편이 아닌데, 아내의 권유로 함께 봤다. 추천을 받았는데 충분한 가치가 있을 거 라고… 다 보고 나서 돈을 더 내고 보더라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가 아닌 실제로의 삶과 죽음을 담담하게 그려나가 더욱 감회가 깊었다.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라는 물음에 아직도 침묵 할 뿐이다. 어쩌면 그 대답을 위해서 내게도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 남아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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