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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 - 덜 풍요로운 삶이 주는 더 큰 행복



자발적 가난을 위하여

 

오늘날 재산이라는 용어는 오직 경제적 가치로만 이해되고 있다. 개인이나 국가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행위가 인간이나 자연의 고결함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는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부를 축적하는 데에만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부는 소유의 유일한 수단이 되었으며, 인간의 능력은 창조성을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산의 증가를 위해서만 쓰도록 강요 받고 있다.

 

물론 가난은 부가 존재하는 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삶에서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풍요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강요된 가치 시스템 속에서 재산의 증가를 향해 안간힘을 쓰도록 하는 것, 삶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오로지 경제적 신분 상승의 좁은 사다리를 오르도록 하는 것들이 현재 유일한 대안으로 정립되고 있다.

 

이러한 재정능력을 갖추려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져오는 가장 슬픈 비극은 그것이 인간관계를 제멋대로 휘젓는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인간관계는 서로 충분한 보상을 주는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은 타락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정신적 이로움이 아니라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제한된다. 부의 신기루가 독점해 버린 가치 체계는 인간 정신을 왜곡하여 자연스러운 자아 발견을 위축시킬 것이다.

 

거의 불필요한 물질들에 대한 욕구에 기반을 둔 이 강력한 연합 전선을 무너트리려면 대안 가치의 개발이 시급하다. 이러한 물질과 직위를 얻으려는 헛된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자발적 가난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통해 절제된 생활 태도를 받아들임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히 소유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재산이 뜻하는 바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 재정립의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신선한 공기, 맑은 물, 침묵과 마음의 평화, 건강, 그리고 무엇보다도 좀 더 깊은 차원의 자유)가 점점 더 귀해지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대체적으로 부는 도시에 집중되어 있으며, 부를 추구하고 보존하는 것은 거의 도시화 과정을 수반한다. 부는 시장과 화폐의 흥망성쇠, 인간의 조절 범위 너머에 있는 요인들, 손실에 관한 불안들 따위에 선점되어 있다. 그러나 풍요로운 삶과 과식, 자기 탐닉과 무절제의 뒤를 따라서 질병이 뒤따라온다. 이러한 비참함은 대부분 부자들에게 알려진 것이며, 그들은 상대적으로 덜 행복한 삶을 산다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부란 물질과 재산, 그리고 돈의 소유를 의미하는 것일 뿐, 행복이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삶의 불확실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복 받은 사람이 반드시 부자일 필요가 없으며, 부자들이 불행한 삶을 영위하는 것 또한 드문 일은 아니다.

 

부가 가져오는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단순히 소유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추구하게끔 하는 가치관의 재정립이 중요하다. 이것은 부유함에 양심을 불어넣고자 하는 노력을 뜻한다. 또한 그것은 참된 가치를 세우려는, 부를 얻기 위한 아수라장 속에서 잊혀진 전통적 가치를 복원하려는, 그리고 본능에 지배당한 인간들에게 개인적 가치의 소중함을 일깨우려는 노력과 닿아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시도들은 여가 시간이나 자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배경 정도로 하찮게 여겨지고 있다.

 

반면에 부를 최상으로 여기는 이 사회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그 안에서 살아 남을까 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생존 경쟁은 기존의 가치 체계를 굳히는 데 일조한다. 따라서 독점화되어 가는 부에 서로 고통 받지 않으려면 그것을 쫓아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탐욕스러운 이기주의를 소멸시키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자발적 가난'이다.

 

가난이라는 말은 안락하고 감각적인 쾌락과 육체적 편리함을 위해서만 부를 갈구하는, 그리고 이러한 부의 추구를 지극히 윤리적인 삶의 방식의 정당한 표현으로 바라보는 현재의 우리 문화에서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온갖 이데올로기들은 참된 생각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채 현 상태의 안락함만을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낡은 의식과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전개해야 한다.

 

  본래 질서는 라고 말함으로써 무에서 나온 피조물이라기 보다는 아니오라고 말 할 수 있는 자발성을 뜻한다. 위에 있는 신들은 아래에 있는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긍정을 통해서 무언가를 창조한다. 인간의 의식은 신과 짐승 양자 모두가 거절해 버린 '반성'이라는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신과 짐승은 상황의 긍정을 통해서, 즉 신은 정신적 직관의 힘을 통해서, 짐승은 하등한 두뇌 조직이 경험하는 물질성이라는 감각적 실체를 통해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들은 반성이 필요 없다. 반성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우리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맹목적인 물질관을 의식적으로 거절하고 점검하며 반성할 수 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인간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 나갈 수 있다.

 

, 기본적 필요가 충족되고 난 후 불필요한 것들이 삶을 어지럽히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자발적 가난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비록 어디에서 자발적 가난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과잉의 징후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곳에서, 생존의 기본적 욕구가 달성되고 삶의 이면을 탐구하고자 하는 열의가 생겨나는 곳에서 늘어나는 소유의 무게와 깨달음 간의 선택이 가능해지는 그런 공간이 형성될 것이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소유의 스펙트럼의 가장 밑바닥에는 생존을 위한 기본 욕구가 충족된 사람들과 반대편에 있는, 선택할 여지도 없이 생존을 위한 기본 욕구를 채우기에도 급급한, 하루하루의 생존만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인 절망적인 빈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뒤돌아볼 시간도, 뒷걸음질 할 공간도 없다. 이 절대 빈곤 앞에서는 자발적 가난도 잠시 그 빛을 잃고 만다.

 

하지만, 지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물질주의적인 부의 가치에 맞서서 가져야 할 생각은 파괴적인 반대가 아니라 건전한 재교육이란 것이다. 타인을 지배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관점이 스스로를 구원 할 것이며, 이렇게 부의 권력을 누리려는 열망에서 스스로 물러서는 것은 어떠한 집단도 막을 수 없다. 부를 향해 발버둥치는 무리들로부터 물러나서, ‘자발적 가난은 확고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그 힘을 얻는다.

 

법률이 필요한 곳은 탐욕과 갈망, 그리고 사적인 이익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확장이 성행하는 곳이다. 반면 자발적 가난은 이러한 욕망들 너머에 존재한다. 오직 자발적 가난만이 인간의 기본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이 모든 갈등을 해소 시킬 수 있다.”

 

-안드레 밴던브뤼크

 

E. F. 슈마허 등 자발적 가난 - 덜 풍요로운 삶이 주는 더 큰 행복 중에서


 

 

자발적 가난이란 우리의 옛 어른들이 삶에서 본받고 이루고자 했던 청빈(淸貧 ; 성품과 행실이 곧고 탐욕이 없는 가난)안빈낙도(安貧樂道 ;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리를 지키며 기꺼이 즐거워 함)와도 통해있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