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실과 상상의 시간
일선에서 은퇴한지도 벌써 여섯 해. 바쁠 것도 없건만 시간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쉼 없이 흘러간다. 그 흐름 속에 내가 직접 부딪치는 현실의 시간들은 점점 줄어든다. 반면 과거를 돌아보거나 앞날을 가늠해보는 상상의 시간들은 점점 늘어간다.
언제 진정될지 모르는 코로나19 재난에 더하여, 아무래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일 것이다. 자문자답自問自答, 그렇게 혼자 주고받는 시간이 많아서 일 것이다.
평소 관심 있던 책들을 읽고, 가슴에 생각들이 쌓이면 더 굳어지지 전에 꺼내 글로도 옮겨 보고, 텃밭 마당에 나가 하늘 향해 기지개 켜며 심호흡도 하고, 숙면을 위해 베란다에 나가 겨울 햇볕을 끌어 모아 온몸에 쪼이고, 오디오 북을 들으며 서곡천瑞谷川 물길 따라 강아지랑 산책을 하고, 또 다시 관상동맥이 막혀 심장이 망가지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사이클과 러닝 머신 위에서 쳇바퀴를 돌고, 간간이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고, 이따금 SNS로 지인들과 대화를 하고, 때때로 한밤중 깨어 명상 아닌 명상으로 우주의 시공간을 여행하곤 하지만, 그 대부분은 현실의 시간이라기보다는 상상의 시간에 가까운 것 같다. 그 시간들 중 일부 직접 행동하는 걸 빼고 나면 대부분 상상으로 채워지니까.
초월주의超越主義(Transcendentalism, 개인의 도덕적 완성과 자연과의 친화를 먼저 생각함)를 추구하며, 인류가 그토록 찾고자 한 진리眞理가 사회나 제도나 법률이 아닌 자연自然 속에 있었음을 발견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생전의 편지에서 이러한 <현실을 넘어선 현실>에 주목하였다.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것이 아무리 눈에 띄는 일이라 해도
내게는 마음 속 상상이 만들어내는 일들보다
훨씬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우리가 흔히 삶과 죽음이라고 부르는
현실이란 참으로 환영과 같고 무의미하며,
내게는 꿈보다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진 생각이 삶의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단지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불어 가는 바람이 쓰는 일기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겐 가치를 따질 수 조차 없는 놀라운 사고 능력이 있습니다.
시도해 보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시도하십시오.
배가 고프지 않으면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되도록 신문을 읽지 마십시오.
습관적으로 감상에 젖지 마십시오.
건강을 위해 스스로 육체를 돌보십시오.
모든 일이 자신의 생각과 같으리라고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그 밖의 다른 일은 모두 잊어버리십시오.
우리는 마치 거북이처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의 껍질 속에 자신을 가둬왔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존재 안에는 철학 이상의 그 무엇이 있습니다."
1850년 8월 3일
소로가 신학자 해리슨 블레이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2. 꿈과 환상의 시간
사전에 따르면 <상상想像>은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것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것'이고, <환상幻像>은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으로 정의되어 있다. 즉,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 여부가 상상과 환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 ‘만물은 일체一體로 그 차별이 있을 수 없고 그 자체로 평등하다’는 논리) 편에 나오는 장자가 꾼 꿈 이야기인 호접몽胡蝶夢을 들어보자.
"내가 지난밤 꿈에 나비가 되었다. 너무 기뻐서 꽃 사이를 정신없이 날아다니느라 나비가 나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꿈을 깨니 나는 나비가 아니라 내가 아닌가? 아까 꿈에서 나비가 되었을 때는 내가 나인지도 몰랐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분명 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와 나비는 별개인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 구별이 애매한 것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사물인 나와 나비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를 물화物化라고 한다. 나와 사물은 결국 하나이다.
꿈인지 현실인지에 대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더 나아가 크고 작음, 아름답고 추함, 선하고 악함, 옳고 그름,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을 구분하려는 욕망 역시 덧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 모든 구분이 없어도 저절로 다 이루어진다."
장자가 꾼 꿈은 환상이기도 하지만 현실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나의 삶과 상상도 현실이기도 하지만 환상이기도 할 것이다. 때로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환상으로 치부하며 또 다른 현실로 돌아가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하지만 그건 가능하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으며 자연스럽지도 않은 것 같다. 스스로 상황을 헤쳐나가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과 노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시작과 끝, 나이 듦과 안 듦,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을 애써 구분하지 않는다면 바람과 노력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고 나날은 더 평온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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