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편집인이었던 그는 남북전쟁(1861~1865) 참전 중 사랑하는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전쟁이 끝나도 마땅히 돌아갈 곳이 없던 그는 텍사스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뉴스 읽어주는 일을 한다.
에라스 카운티의 한 광산, 멕시칸과 인디언들을 포함한 노동자들이 세상 돌아가는 뉴스를 들으려 모였다. 광산 고위 관계자는 그에게 그 지역신문을 건네주며 거기에 있는 기사를 읽어주라고 주문한다. 탈출한 광산 노동자들이 발각되어서 돌에 맞는 그림이 삽입된 뉴스이다.
잠시 난감해하던 그는 눈으로는 그 신문의 그 기사를 읽지만, 입으로는 전혀 다른 기사를 읽어준다. 열악한 환경의 광산에서 폭발사고로 갱도가 무너져 일부가 죽거나 다쳤으나, 나머지 생존자들은 동료들이 필사적으로 구조 작업 중이라는 뉴스였다.
이 사태에 당황한 광산 관계자들. 반면 노동자들은 나머지 생존자들이 무사히 구출되었는지가 궁금하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다시 길 떠날 채비를 하고, 한 젊은 노동자는 그들이 무사히 구출되었는지를 묻는다. 그는 광산 관계자가 읽어주라고 했던 그 신문을 건네며, 물론 무사히 구출되었다고 대답한다. 그제서야 내막을 알게 된 젊은 노동자는 환하게 웃는다.
이상은 넷 프릭스 배급 영화 「뉴스 오브 더 월드」 중에서 기억에 남는 대목이다.
물론 떠도는 중에 부모 잃고 인디언의 보호를 받던 백인 소녀를 만나고, 친척을 찾아주는 여행 과정을 통해서 자신도 잃었던 삶의 길을 되찾게 된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거의 대부분의 뉴스가 며칠씩 기차에 실려온 신문을 통해 전달되던 그 당시와 비교하면, 오늘날의 뉴스는 거의 실시간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 중에는 올바르거나 감동적인 뉴스도 있지만 안타깝거나 화나게 하는 뉴스도 있고, 있으나 마나 한 뉴스도 있으며, 편향적인 뉴스를 넘어서서 조작된 가짜 뉴스도 있다. 우리 스스로가 판단력을 잃지 않고 그런 뉴스들을 걸러내야 할 이유이다.
각지로 거미줄 같은 철도가 건설되며 뉴스도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던 그 당시 상황에서도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런 조언한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신문기사에서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신문 값에 해당하는 동전 몇 푼의 가치밖에 안 되는 내용들뿐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뉴스를 필요로 하며, 또 그런 뉴스를 묵묵히 들어줍니다.
그러면, 그것은 새로운 문명의 이기일까요? 새로운 재난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진리의 새로운 모습일까요? 과연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게 그러한 뉴스일까요?
당신은 “우정, 책, 자연, 사색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평화로운 순간들은 머뭇거리며 찾아온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신성한 기다림의 자세가 아닐까요? 일종의 소박한 기다림이 아닐까요?
그런 기다림은 우주의 음악을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기다려온 일들을 즐기는 동안 우리 마음속에는 서서히 만족감이 스며듭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신학자 '해리슨 블레이크'에게 보낸 1850년 5월 28일 편지 중에서-
‘소로’는 미처 여과될 새도 없이 우리 안을 밀고 들어오는 뉴스들이 과연 우리가 그토록 원해온 진리인가를 반문한다. 자연 속을 산책하며 사색하고, 우정을 나누고, 책과 가까이 하는 평화로운 순간들이 오히려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 아닌가를 우리에게 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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