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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다시 펼치며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이야기를 하자면, 훨씬 앞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이전으로, 내 유년의 맨 처음까지, 또 아득한 나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리라. …

 

 현실 속에서 살아있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미해져 버렸다. 그 하나하나가 자연의 단 한 번의 소중한 시도(試圖)인 우리 자신인 사람. 우리는 그 사람을 무더기로 쏘아 죽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 번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우리들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오직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오직 한 번뿐인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스스로 주목해야 할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 존재에게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는 반복 되는 일이 없는 단 하나의 점인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며,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누구 속에서든 정신은 영혼이 되고, 누구 속에서든 살아있는 존재로써 고뇌로 괴로워하며, 누구 속에서든 자신만의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느끼는 사람은 오늘날에도 별로 없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느끼는 사람은 그만큼 편안하게 죽을 수가 있다. 나도 이 이야기를 하고 나면 좀 더 수월하게 죽게 되기를 바란다. …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더 이상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지는 않는다. 내 피가 몸 속에서 소리 내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였다. …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삶처럼, 모든 개인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있는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이나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곳에서 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試圖)이며 투척(投擲)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꿈을 향하여 노력하며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헤르만 헤세 – 『데미안』 서문 중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다시 꺼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근 50년 만이다.

  

 물론 중학교 시절 방학 때 책장에서 꺼내 읽었던 헤르만 헤세 전집 중의 그 책은 아니다. 그 책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다. 읽었다는 기억만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다시 꺼내든 책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적응하게 된 전자책이다. 형식만 바뀌었을 뿐, 그 내용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읽는 내가 변했다. 세월에 따라 주름져가는 내 얼굴과 거기에 순응해 끝을 향해 내닫는 생각들은 뽀얗고 꿈 많던 그때와는 많이도 멀어져 버렸다.

 

  그러나, 서문을 읽으며 새삼 느낀다.

 

 인생의 시작인 봄날과 그 끝인 겨울날은 아주 멀리 떨어진 게 아니었다는 것을. 늘 시작하던 곳 바로 뒤 켠에서 끝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언제나 먼 데를 바라보며 앞으로만 나아갔기 때문에, 나는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시작이 있어야 끝도 있고, 끝이 있어 시작도 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대부분의 세월 동안 나는 잊고 살았다.

 

 그러고 보면 삶과 죽음도 전혀 동떨어진 게 아니었다. 삶이 있어야 죽음도 있고, 죽음이 있어 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도 그저 편안하게 죽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남은 생을 수월하게 사는 길이기도 하다고 여겨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