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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장자의 우주, 자연 그리고 道

 

 『원래 원시 지구의 대기는 수소로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10억 년 전쯤부터 식물들이 협동 작업을 통해 지구 환경을 엄청나게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그 시절 바다를 가득 메운 단순한 녹색 식물들이 산소 분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자 자연히 산소가 지구 대기의 흔한 물질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지구 대기의 성질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생명 현상에 필요한 물질이 그때까지는 비 생물학적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으나, 산소 대기의 출현으로 지구 생명사의 신기원이 세워진 것이다. 산소는 유기 물질을 잘 분해한다. 사람은 산소를 좋아하지만, 무방비의 유기물에게는 근본적으로 독이나 다름없다. …

 

 지구 대기의 질소는 산소보다 화학적 활성도가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훨씬 무해한 분자이다. 그렇지만 지구 대기에 질소가 유지되는 과정에도 생물이 크게 관여하고 있다. 지구 대기의 99%가 생물 활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파란 하늘은 생물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수백만 년 전에 최초의 인간이 나타났다. 인류의 조상이 숲에서 성장했기 때문인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숲에 친근감을 느낀다.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저 나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나뭇잎들은 광합성을 하기 위해서 햇빛을 받아야 한다. …

 

나무는 햇빛을 생존의 동력으로 삼는 아름답고 위대한 생명체이다. 땅에서 물을 길어 올리고 공기 중에서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여 자신에게 필요한 음식물을 합성할 줄 안다. 그 음식의 일부는 물론 우리 인간이 탐내는 것이기도 하다. 합성한 탄수화물은 식물 자신의 일들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궁극적으로 식물에 기생해서 사는 우리 같은 동물은 식물이 합성해 놓은 탄수화물을 훔쳐서 자기 일을 수행하는데 이용한다. 우리는 식물을 먹음으로써 탄수화물을 섭취한 다음 호흡으로 혈액 속에 불러들인 산소와 결합시켜 움직이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뽑아낸다. 그리고 우리가 호흡 과정에서 뱉은 이산화탄소는 다시 식물에게 흡수돼 탄수화물 합성에 재활용된다. 

  

동물과 식물이 각각 상대가 토해내는 것을 다시 들이마시다니! 이것이야말로 환상적인 협력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지구 차원에서 실현되는 일종의 구강(口腔) 대 기공(氣孔)의 인공 호흡인 것이다. 그리고 이 위대한 순환 작용의 원동력이 무려 1 5000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태양에서 온 빛이라니! 자연이 이루는 협력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생명 현상의 뿌리에는 세포의 화학반응을 조절하는 단백질 분자와 유전 설계도를 간직한 핵산이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본질적으로 같은 단백질 분자와 핵산 분자가 모든 동물과 식물에 공통적으로 관여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생명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참나무와 나는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좀 더 먼 과거로 올라간다면 동물인 나와 식물인 참나무의 조상은 같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 ‘우주 생명의 푸가(fuga)’ 중에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지구 생명체들의 ‘물질대사’와 계통수’.

이 부분을 읽어 내려가다가 잠시 숨을 고른다.

나는 장자(莊子)’오쇼 라즈니쉬의 입을 빌어 피력한

우주 자연과 생명과 道의 원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으로부터 그대는 숨을 쉬는가?

사실 그대가 숨을 쉬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

宇宙 自然, 存在界 全體가 그대를 숨을 쉬고 있는 것이지,

그대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숨을 쉬고 있다라는 것은 아집(我執)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다.

우주가, 자연이, ‘그것이 나를 숨 쉬고 있다고

 

살아 숨 쉬는 어떤 것이 찾아올 때 그대는 사라진다.

그때 그것, ‘가 그곳에 있다.

따라서 道의 사람’(眞人)

라는 것을 따로 떼어내서 분별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일임을 이해한 者다.

’, 그것은 집착만 일으킬 뿐 자연 세계에서 쓸모가 없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버린다.

 

 사실 그것을 버릴 필요가 없다.

그대가 진정한 이해에 도달한 순간

그것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거기 더 이상 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그는 생활하고 먹고 사랑하고 잠잔다.

하지만 거기에 는 없다.

그것이 그를 통해 삶을 산다.

 

거기에는 아무런 짐도, 긴장도, 불안도 없다.

그대로의 어린아이가 된다.

그의 마음은 자유롭고 무심(無心)의 경지에 있다.

 

최상의 궁극적인 자연을 장자는 道라고 부른다.

道란, 자연이란 최상의 궁극적인 것이며,

개선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만일 그것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불구자가 되고 만다.

 

원래 모든 어린아이는 道 속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모든 어린아이는 자연 상태 그대로를 산다.

그런데 우리는 道 속에서 태어난

자연 상태의 어린아이들을

나아가 우리 스스로를 불구자로 만들고 있다.

사회라는 것으로,

문명과 문화와 도덕과 종교라는 것으로

그리하여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지만

더 이상 온전히 살아있지 않아 왔다.

 

 

 

*

 되도록

좁은 방안에 를 놓아두고

너른 밖으로 나가

아름답고 위대한 나무에 감사하며

장자칼 세이건을 통해 들려주는

우주 자연 생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일이다.

그 우주가,

자연이,

바람이,

나무가,

나를 숨 쉬도록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