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고령자의 약 70% 이상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삶을 마무리한다고 한다.
‘브리티쉬 메디칼 저널’에 의하면 ‘조화로운 삶의 마무리’(good death)란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삶을 마무리 할 것인지에 대해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태어남, 나이 듦, 병듦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엄연한 삶의 한 과정이므로 마지막까지 인간의 존엄성은 지켜져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지난주 읽었던 책들 중에 자발적으로 삶을 완성하고 마무리한 분들의 이야기가 있어 별도로 옮겨본다.
런던으로 돌아온 나는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당신 어머니는 여든의 나이로 가족을 향한 봉사 의무를 다 했으며,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었으니 금식으로 영과 육의 분리를 맞이하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고, 죽음으로써 다시 새 삶을 얻을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온 동네를 돌며 친구와 친지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이제껏 혹시라도 저질렀을지 모르는 과오에 대한 용서를 빈 후 그 다음날부터 당신 어머니는 약간의 물 이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금시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가 많은 승려들이 축복을 빌고자 혹은 그분의 축복을 받으러 찾아왔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금식을 통해 두 팔 벌려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용감하며 거룩한 행동인지는 익히 알려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분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기 위해 찾아왔고, 당신 어머니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표정과 눈빛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노래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25일간의 금식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는 구루, 수많은 학교 선생, 시인, 철학자 그리고 유명 인사 등 이제껏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어머니만큼 지혜로운 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문맹인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그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강직한 분이었습니다.
사티시 쿠마르의 <끝 없는 여정 – 지혜로운 이 ‘어머니’의 죽음> 중에서
헬렌 니어링은 남편 스코트 니어링과 함께 낡은 농가에 살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선 삶의 양식을 끊임없이 모색했던 사람이다. 문명의 혜택을 최소화하고 노동과 사유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나갔던 두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아름다운 위엄을 잃지 않았다. 스코트 니어링은 100세가 되던 해 음식을 서서히 줄여 나감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생태주의자, 반전운동가, 채식주의자 등 그 부부에게 흔히 따라다니는 말만으로는 두 사람이 남긴 삶의 향기를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나희덕 산문집 <저 불빛들을 기억해 – 삶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 것가> 중에서
내 남편 스코트 니어링은 유유히 그리고 선명한 의식 속에서 죽어갔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았기에 미리 죽음을 계획했다. 그가 명료하게 경험하고 싶어 했던 것은 심사숙고의 과정, 즉 자신의 삶을 유지하면서 죽는 것이었다. 그에게 죽음은 다만 성장의 마지막 단계, 자연스러운 생명의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끝에 다다랐음을 알았고,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죽기를 바랐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바로 그렇게 살기를 소망했다.
그의 목표는 약과 의사 그리고 병원이나 요양소에서 강제로 먹이는 음식들을 멀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집에서, 평온하게 그리고 가장 좋은 때에 죽기를 바랐다. 소박하고 침착하며 꿋꿋하게 죽기를 말이다. 그러고는 평온하게 그리고 의식을 지닌 채로 죽음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물만 먹고 지낸 지 일주일 뒤 죽음이 다가온 바로 그 순간, 그는 초연한 자세로 그리고 여전히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마지막 숨을 내 쉬었다. 낙엽이 떨어지듯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그의 영혼은 떠나갔다.
헬렌 니어링 <인생의 황혼에서 –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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