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출장중의 일이다. 그 당시 마닐라 동남쪽 시골 동네 단독주택을 임대해 약 6개월 반을 머물렀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전기가 자주 나가곤 했다. 한번은 강한 태풍으로 많은 나무들과 전신주들이 쓰러져 여러 날 단전 상태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첫날 밤은 필리핀 현지회사의 운전하는 직원이 양초 여러 자루를 건네 줘 버틸 수 있었는데, 초가 가늘어 촛농 반 이상이 녹아 흘러내려 이틀을 못 넘기고 바닥나게 되었다.
셋째 날은 어둠 속에서 어찌 할까 고민하던 중에 집 밖에서 경비를 서던 직원이 염려 말라며 위 사진의 기름불을 만들어 주어 여러 날 저녁을 책도 읽으며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그는 주방에 들어가 대접 2개, 굵은 소금 한줌, 쓰던 식용유를 꺼내 왔다. 자기가 구해온 실을 꼬아 소금 담긴 대접에 꽂아 심지를 만들고는 식용유를 부었다. 심지에 불을 붙이고는 나머지 물이 담긴 대접에 포개 놓았다. 과열 방지용이란다. 비싼 양초 대신 대다수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흔히 만들어 쓰는 기름불이라는 설명이었다. 가격 면에서 비싼 석유대신 엄청 싼 식용유이다. 물론 냄새는 아주 고소했다. 필리핀에선 자국생산 농산물이 엄청나게 싸다. 그래서 대다수 농민들이 더욱 가난한지 모르겠다.
사실 내가 보기에 일부 부유한 집들도 있었지만 대다수 필리핀 집들이 가난했다. 대부분의 집들이 허름해 잦은 태풍으로 피해를 입는다. 하지만 열대지방 특유의 낙천성 때문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수리하며 활짝 웃고는 했다. 허름하고 누추한 걸 결코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생일이라며 집에 초대하곤 했다. 대부분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예전 우리도 잦은 정전에 촛불과 기름불을 밝히던 시절이 있었다. 다들 지금보다 더 가난했다. 지금 보다 더 불편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따뜻했다. 이제라도 되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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