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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소박함 – 적은 것이 행복하다



자발적 소박함이야 말로 인간이 유일하게 지녀야 할 삶의 正義이다.

과도한 풍요의 사회에 나는 그 치유책으로 자발적 소박함을 제시한다.

 


돈의 노예

 

전통 문화는 우리를 지구에게 속한 존재로 보며,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절제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지구를 우리에게 속한 대상으로 여기며 스스로의 존립 기반을 흔든 과욕의 문명이 전통 문화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현대 문명이 도래하면서 생겨난 이 역사적 현상은 눈부신 기술 발전을 기반으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고, 문명의 종말을 향해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에너지 연소를 전제로 한 성장 패러다임은 지구 전체에 이례적인 질서 하나를 만들었다. 시공간 개념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기술은 그것을 발명한 사람과 그 혜택을 보는 사람들에게 태초 이래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엄청난 힘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이 혁신적인 기술을 통제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끌고 갈 만큼 인간의 의식이 충분히 진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술의 탈선 위험은 점점 구체화되고 있다.

 

이처럼 스스로를 조물주라고 여기는 인간은 태초부터 수립된 자연의 규칙을 위반하고 심지어 자연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지경에 이르렀다. 태초의 인간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한 반면,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은 자연을 예측하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개발하려 애쓴다.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금으로 변화시키는 미다스의 손은 지금의 시대 정신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금은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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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소유 여부에 따라서 단편적으로 나뉜 무너진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 구성원들은 점점 더 큰 불안을 느끼는 한편 이성과 감성의 상호 존립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상생활을 더욱 잘 견뎌내기 위한 진정제 또한 만들어 낸다. 실상은 사람의 정신을 홀리는 의 노예가 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인간 스스로 세상을 창조하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스스로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것에 소유된 존재다. 경제 학자들은 여러 가지 수치와 방정식, 비율들을 늘어 놓으며 표면상으로 지극히 합리적인 현상의 메커니즘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소를 숨기고 있다. 돈이 인간의 주관성에 깊이 뿌리내린 형이상학적인 신앙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은폐하는 셈이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점에서 탐욕적인 강박관념이 된 돈은 초월적인 지위를 부여 받고는 제멋대로 희망과 절망을 가지고 놀며 세상을 지배한다.

 

어쩌면 돈이 가져다 주는 허영심이 덧없고 유한한 삶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없애 주는 해독제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화려한 아름다움에 발맞추지 못한다면 삶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야 작금의 현상이 온 세상에 만연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소박함과 간소함

 

지금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것은 경제적이라는 것의 참뜻과 정확히 반대된다. ‘경제적이라는 미명하에 인류가 스스로의 생존에 필요한 자원과 재화를 이토록 심하게 낭비하는 전례는 그 어디에도 없다. 엔트로피 법칙(자연 물질이 변형되어서 다시 원래의 상태로 환원될 수 없게 되는 현상)이 이렇게 득의 양양한 경우도 없었다.

 

그런데 자연은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경제적 사용이란 무엇인지 매우 훌륭한 가르침을 전해 준다. 지금껏 자연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아껴 쓰는 경제적 사용덕분이었다. “없어지는 것도 없고 새로이 생겨나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은 서로 변환될 뿐이다라던 저명한 프랑스 화학자 라부아지에의 말은 자연에는 쓰레기통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오늘날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것은 포식 행위를 교묘하게 하나의 학문으로 만드는 기술이 되었다. 이 복잡한 학문은 재물을 과도하게 쌓아두는 잉여 부분에 많은 자리를 내주고도 이를 정당화 하고 있다. 반면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서는 소박하고 간소함과 더불어 살아가는 기술이 최적화되어 있었다. 사막의 극심한 더위와 빙하지대의 얼음 벌판처럼 사람이 살아가기 힘든 환경 속에서도 인간은 보잘것없는 수준이나마 자신에게 주어진 약간의 자원에 가치를 부여할 줄 알았다. 지구상의 수많은 전통 부족들은 실제 현실 속에서 이 같은 균형점에 도달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다.

 

과거에는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덕적 계율로써 부정적인 충동들을 억제할 수 있었고, 지도층은 집단 내 조화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권위를 행사했다. 우리가 진심으로 원한다면 소박함과 검소함의 가치로도 얼마든지 삶의 지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잉여분으로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 길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인간의 미래

 

종교 덕분에 초월성을 자각하게 되기는 했지만 나는 종교를 믿지는 않는다. 그런데 자발적 소박함이라는 것은 확실히 신비롭고 정신적인 영역에 속하는 문제다. 그 내면을 파헤쳐 보면 이 정신적인 영역은 곧 자유의 공간이자 존재 방식의 무게가 짓누르는 고통을 넘어서게 만든다.

 

사후의 삶이 과연 존재하는가?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한 뒤로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이 질문에 딱히 이렇다 할 결정적인 답은 없다. 확신을 갖고 믿는 사람들에게나 사후 세계가 존재 할 뿐이다. 우리는 가설을 세울 뿐이고 이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제기하는 논란들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 있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답을 스스로 제시하며 자신의 확신을 강화할 수도 있고, 의심하고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며 무신론에 빠져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제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름답다고 해도, 창의적이고 머리가 뛰어나다고 해도, 우리는 그 어떤 종교도, 예술도, 과학도, 정치도, 철학도 이 세상을 다 진정시킬 수 없고 우리의 마음과 의식을 다 안정시킬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밖에 없다. 이 모든 분야가 없다면 물론 이 세상이 지금보다 더 거친 곳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것들이 오히려 대립과 폭력을 조장하는 요인이라는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다.

 

사후의 삶이 존재하는지 고민하느라 보내는 시간이 삶이란 무엇인지 깨닫는데 할애되지 않는다는 것은 유감이다. 아울러 그 시간이 삶의 위대한 가치를 이해하면서 중용이라는 삶의 지혜에 따라 활기차고 적극적으로 인간답고 훌륭한 삶을 살고자 하는데 할애되지 않는다는 것도 애석한 일이다. 삶의 신비로움 속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실컷 의미 없는 고통에 시달리다 삶이 끝나갈 무렵에야 비로소 죽은 이후의 삶이 아닌 죽기 이전의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문하게 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삶의 완성을 경제적 성공이나 정치적 성공 같은 척도로 가늠할 수 있을까?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그리 잔잔하지 않은 강물에서 모든 것은 일시적인 요소일 뿐이다. 위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도 모두 역사 속으로 멀어져 가고, 침묵의 무한성 속에서 차츰 사라지며 우리 기억 속에 흔적만을 남길 뿐이다. 모든 학문들을 다 모아 놓아도 우리에게 명확한 답을 제시해 줄 수는 없다. 그렇게 사고가 한계에 부딪히면, 사고는 침묵 속에 우리를 미지의 영역으로 데려간다. 그때 비로소 생각은 진정되고 겸손과 소박함의 미덕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우리 내면의 존재 앞에 그 어떤 말로도 축약될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가 열린다.

 

본질의 본질을 알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구가 부딪히는 침묵의 벽은 가장 큰 고뇌의 원인이 될 수 있으며, 삶을 감옥과도 같은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우주는 우리를 절대적인 자유의 세계로 초대한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씨앗이 어떻게 싹을 틔우고 어떻게 삶을 지속시키는지에 대해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지식이 삶의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우리가 뒤쫓는다고 해서 진리가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어떤 철학도, 어떤 교리와 계율도, 어떤 사상도 진리를 손에 넣을 수 없으며 이를 가둬 둘 수는 더더욱 없다.

 

진리가 드러나는 것은 오직 우리가 사변적(思辨的)인 생각을 없애고 스스로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었을 때뿐이다. 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는 침묵 속에 있을 때에만 진리는 우리를 찾아 온다. 침묵 속에서는 말해 봤자 의미가 없는 문제들에 대한 관점이나 견해가 설 자리가 없다. 진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앞서 존재한다. 우리의 머나먼 조상인 원시인들이 삶이 생동하는 모든 현장에서 느꼈을 초자연의 위력도 결국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자발적 소박함

 

인류가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분배하는 구조는 전체적으로 불공평한 것이 사실이다. 이 땅에서 난 모든 것은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들에게 할애된 것이지 권력이나 시장의 법칙, 자본, 무기 등으로 스스로 정당성을 자처하는 이들만의 몫이 아니다. 삶의 질서와 지혜에 따라 이 같은 부당함이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한 인류의 운명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극빈과 빈곤, 부유는 이렇듯 하나의 지구 위에 공존하고 있으며, 온갖 억압으로 귀착되는 권력과 재력의 서열을 만든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무한정 더 소유할 것을 부추기는 경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그 이데올로기는 구매력이라는 말로 둔갑하여 통상적인 논리를 벗어나 사람을 일개 소비자로 깍아내린다. 소비 욕구가 적은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경제적 손실로 규정한다. 덕분에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족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소비를 감행하는 것이 사회 구성원이 지켜야 할 일종의 의무가 되었다.

 

감사 중용, 절제 등의 미덕은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가 절대적으로 타파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세계라는 거대한 기계를 이루는 요소인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시각으로 볼 때 이러한 덕목은 세계 경제의 숨통을 조여 그 신진대사에 해롭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박한 삶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 있겠는가?

 

인간과 자연의 순리가 함께하는 아름다움은 참된 인본주의로 나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정신적 양식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대지가, 세상이 다시 기쁨으로 충만한 곳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어떻게 하면 지구에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하면 마음과 정신, 그리고 지성을 충족시키는 문명을 일구어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서의 아름다움은 너그럽고 공평하며 경건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움이다. 오직 이러한 아름다움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내는 그 어떤 아름다움보다 더 강력하다

 

한도 끝도 없이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추구하며 소수를 위해 지구 전체를 망쳐 놓는 현대 문명에 맞서 소박함의 가치는 이성적 판단에 따른 의식적 선택이다. 자발적 소박함은 진정한 행복과 만족의 원천이 되는 삶의 기술이자 윤리이다. 이는 대지를 위해, 그리고 나눔과 형평성의 가치를 위해 움직이는 저항 행위이자 인류 생존의 미래이다.

 

나무와 식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를 먹고 자라는 동물들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대지가 경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