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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정 시집 -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인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게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달마의 뒤란

 

어느 표류하는 영혼이

내생을 꿈꾸는 자궁을 찾아들 듯

떠도는 마음이 찾아 든 곳은

해남군 송지하고도 달마산 아래

 

장춘이라는 지명이 그닥 낯설지 않은 것은

간장 된장이 우리 살아온 내력처럼 익어가는

윤씨 할머니댁 푸근한 뒤란 때문이리라

 

여덟 남매의 탯줄을 잘랐다는 방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모처럼 나는

피곤한 몸을 부린다

할머니와 밥상을 마주하는 저녁은 길고 따뜻해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개밥바라기별이 떴으니

누렁개도 밥 한술 줘야지 뒤란을 돈다

맑은 간장 빛 같은 어둠에

나는 가만가만 장독소래기를 덮는다

느리고 나지막한 할머니의

말맛을 닮은 간장 된장들은 밤 사이

또 그만큼 맛이 익어가겠지

 

여덟 남매를 낳으셨다는 할머니

애기집만큼 헐거워진 뒤란에서

태아처럼

바깥세상을 꿈꾸는 태아처럼 웅크려 앉아

시간도 마음도 놓아버리고 웅크려 앉아

차랍차랍 누렁이 밥 먹는 소릴 듣는

 

해남하고도 송지면 달마산 아래

늙고 헐거워져 편안한 윤씨댁 뒤란은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오늘밤이 오늘밤 같지 않고

어제가 어제 같지 않고

내일이 내일 같지 않고 다만

 

개밥바라기별이 뜨고

간장 된장이 익어가고

누렁이 밥 먹는 소리

천지에 꽉 들어차고

 

 

미황사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은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며얼..... 불생불멸.... 불생불멸.... 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동백꽃 피는 해우소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고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 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이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목탁 소리 도량석을 도는 새벽녘이면

일찍 깬 꿈에 망연하였습니다

발목을 적시는 이슬아침엔

고무신 꿰고 황토 밟으며

부도밭 가는 길이 좋았지요

돌거북 소보록한 이끼에도 염주알처럼

찬 이슬 글썽글썽 맺혔더랬습니다

저물녘이면 응진전 돌담에 기대어

지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햇어둠 내린 섬들은

마치 종잇장 같고 그림자 같아

영판 믿을 수 없어 나는 문득 서러워졌는데

그런 밤이면 하릴없이 누워

천장에 붙은 무당벌레의 숫자를 세기도 하였습니다

서른여덟은 쓸쓸한 숫자

이미 상처를 알아버린 숫자

그러나 무당벌레들은 태앗적처럼

담담히 또 고요하였습니다

어쩌다 밤오줌 마려우면

천진불 주무시는 대웅전 앞마당을

맨발인 듯 사뿐, 지나곤 하였습니다

달빛만 골라 딛는 흰 고무신이 유난히도 눈부셨지요

달빛은 내 늑골 깊이 감춘 슬픔을

갈피갈피 들춰보고, 그럴 때마다 나는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오줌을 누었습니다

눈앞에 해우소를 두고서 부끄럼성 없이

부처님께 삼배를 드릴 때처럼 다소곳이

무릎을 구부리고 마음을 내릴 때

흙은 선잠 깬 아이처럼 잠시 칭얼거릴 뿐,

세상은 다시 달빛 속에 고요로워 한시절

동백나무 그늘 속에 깃들고 싶었습니다

영영 나가지 말았으면 싶었습니다

 

 

궁핍이 나로 하여

 

몇주째 견뎌오던 보릿고개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밥이 되고 공과금이 되고 월세가 될 글을 쓴다

 

그동안 글이 되지 않는다고 투덜대면서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안 된다고

바람 불면 바람 불어 안 된다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배가 불러

오래 묵혀두었던 원고 뭉치를 꺼내

햇빛에 곧 바스라질 것 같은 원고뭉치를 꺼내

먼지도 털고

 

나의 밥줄 286 앞에 앉아

빼고 더하고 곱하고 나누고 엮어

봄나물 다듬듯 글발을 다듬으니

 

웬일인가

그토록 안 받던 화장발이

쥐어짜도 안 나와주던 글들이

시원스레 구토를 하고 설사를 한다

 

이것도 보릿고개 덕이라면 덕이겠다

궁핍이 나로 하여 글을 쓰게 하니

궁핍이 글로 하여 나를 살게 하니

가난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조력자인가

 

 

 

김태정 시인 (사진출처 : 미황사 홈페이지 http://www.mihwangsa.com/ 에서)

 

 

  해남 땅끝 언저리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려진 달마산(達磨山)이 있고, 그 병풍아래 지는 해가 황금빛처럼 물든다는 미황사(美黃寺)가 있다고 한다.

  김태정 시인의 시를 읽으며 꼭 한번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동백꽃 피는 해우소에 버티고 앉아 나무쪽창 만한 바깥세상에도 만족해보리라. 일찍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도 갈라진 틈이나 옹이 구멍을 통해 보더라도 세상의 아름다움에는 변함이 없다.’(소로우의 일기 - 1838 1 16일 중에서)라고 갈파하지 않았던가.  

 

  서울서 태어난 김태정 시인은 번잡한 서울 생활을 다 버리고 미황사 자락에 내려와 10년을 살다 2011 48세에 암으로 육신마저 버리고 미황사 경내 가장 먼저 피어나는 동백꽃, 산벚꽃이 되었다고. 오직 그녀가 남긴 것은 오직 이 시집 한 권이라고.

 

  지리산 시인 이원규는  땅끝 해남의 시인들이란 글에서 미황사 아래순수그 자체의 시인이 살고 있으니 이 또한 눈물겹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에 태어나 가장 죄를 적게 짓고 사는 시인이 있다면 달마산 아래 깃들여 사는 김태정 시인일 것이다. 나는 지리산에 살며자발적 가난운운한 날들이 부끄러울 뿐...”이라고 기록했다고 한다.

내가 김태정시인을 만나 본적은 없지만 이 시집 한 권을 만나 읽는 것 만으로도 정말 그럴 것이라고 믿게 된다.

 

  해놓은 것 없이 훌쩍 예순을 넘겨버린 나도 물푸레나무를 눈 여겨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물푸레나무를 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여러 번... 다만, 그때마다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파르스름 물들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