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매혹시킨 한편의 시 5
사랑
이산하
망치가 못을 친다.
못도 똑 같은 힘으로
망치를 친다.
나는
벽을 치며 통곡한다.
연못
이광웅 (1940 – 1992)
연못은……
내 푸르렀어야 할 나이의 부끄러운 고백들이
어머니 얼굴 밑에
가라앉는 것을 봅니다.
사소한 수많은 화살촉이 찍힌 자리에
내 얼굴을 묻어 보면은
연못은 내 가슴 속 오열의 샘터에서 나처럼
억제해 온 물살을 파문 지우며
사랑의 물놀이를 성립합니다.
연못을 들여다보며 내가 조용히 눈물 뿌리는 것은
고풍한 사원에
촛불 켜지듯이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윤사월
박목월 (1916 – 1978)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가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물
전봉건 (1928 – 1988)
나는 물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웅덩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개울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강이라는 말도 사랑하고
바다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또 있습니다
이슬이라는 말입니다
삼월 어느 날, 사월 어느 날, 혹은 오월 어느 날
꽃잎이나 풀잎에 맺히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물
가장 여리고 약한 물, 가장 맑은 물을 이름인, 이 말과 만날 때면
내게서도 물 기운이 돌다가
여위고 마른 살갗, 저리고 떨리다가
오, 내게서도 물방울이 방울이 번지어 나옵니다
그것은 눈물이라는 물입니다
默言의 날
고진하 (1953 - )
하루종일 입을 封하기로 한 날,
마당귀에 엎어져 있는 빈 항아리들을 보았다.
쌀을 넣었던 항아리,
겨를 담았던 항아리,
된장을 익히던 항아리,
술을 빚었던 항아리들.
하지만 지금은 속엣것들을 말끔히
비워내고
거꾸로 엎어져 있다.
시끄러운 세상을 향한 시위일까,
고행일까,
큰 입을 封한 채
물구나무 선 항아리들.
부글부글거리는 욕망을 비워내고도
배부른 항아리들,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른 항아리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1854년 5월 11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가장 훌륭한 가수가 숲 속의 개똥지빠귀이듯이
진정한 詩人은 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먼산 뻐꾸기 울음소리가 아련한 5월.
진정한 詩란 어떤 것인가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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