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의 『이삭줍기』, 1857년작
친구들과의 연말 저녁모임을 위해 서울로 가는 길. 당초 ‘김수영 문학관’을 들를 예정이었으나, 언제나 볼 수 있는 전시품은 아니지 않겠느냐는 아내의 권유에 ‘예술의 전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혹시 나도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삭을 주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오르세 미술관 이삭줍기展』… 다른 사람들과 함께 떠밀리듯 줄지어 입장하다 보니, 30 분 관람에 관람료가 좀 센 게 아닌가 했던 내 생각이 무색해졌다. 눈에 익었던 작품으로는 르느와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 고흐의 『정오의 휴식』 외 모네, 세잔, 드가, 고갱 등 유명화가들의 그림들도 있었다. 밀레의 『이삭줍기』 그림 앞에는 역시 많은 사람들이 감상에 여념이 없었다. 원본을 마주한다는 기쁨도 잠시 사람들에 밀려 자리를 옮겼다
전시관 밖 로비 의자에 앉아, 미리 챙겨간 책의 해당 부분을 천천히 음미했다.
"『이삭줍기』에는 세 여인이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들은 이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농민들이다. 먼 배경에서 커다란 추숫단을 쌓느라 바쁜 사람들은 이들에 비하면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이다.
당시 이삭을 줍는 일은 누구나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관청과, 가진 자와, 이웃의 눈치를 살피며 이 일에나마 감지덕지해 여인들은 대지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밀레는 이들을 지평선 아래 배치했다. 마치 이들로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선인 것처럼 지평선은 하늘로부터 그들을 분명하게 갈라놓는다. 그런 만큼 이들은 더욱 철저히 대지에 예속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여인들은 운명을 비관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앞의 이삭을 줍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이렇듯 어렵고 힘겨운 삶을 살고 있음에도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결코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삶을 스스로의 노동으로 부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노동이든, 노동하는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이 비루해지고 천박해지는 것은 노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거지나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는 다 같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은 자들이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로부터 찬송가와 같은 거룩한 ‘노동의 송가’가 울려 나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노동을 예찬하고 노동자의 존엄을 표현한 밀레의 그림이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평가를 달리 받곤 했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밀레를 혁명의 동지로 생각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밀레를 체제 전복을 지지하는 위험한 인물로 생각했다. 한 보수 비평가는 『이삭줍기』를 보고 프랑스 대혁명 당시 ‘폭도’들의 창과 단두대를 연상시킨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밀레의 입장은 분명하고 순수했다. 그는 이념에도,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직 땅은 정직하며 노동은 존엄하다는 것, 따라서 땅과 노동을 삶의 원천으로 삼는 인간을 그만큼 존엄한 존재로 그리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관심이 없었다. "
이주헌의 행복한 그림 읽기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 혁명과 예술을 실어 나르는 기차역 오르세 미술관 중에서
되짚어 살펴보니, 밀레가 본래 그림 안에 담고자 했던 소박하되 존엄한 뜻과는 달리 그림 밖 액자가 너무 거창하고 화려했던 것 같다. 아울러 더 큰 위로가 필요한 가난한 이들도 부담 없이 그림을 접하고 용기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밀레는 그림을 그렸을 거라는 추측도 했다
새해에는 거창하고 화려한 껍질을 벗겨내고, 소박하고 존엄한 본질이 더욱 존중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큰 위로가 필요한 가난한 이들이 더욱 용기 내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것이 내가 주운 이삭인가 보다.
[사진출처]http://photo.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0/28/20161028021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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