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強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為也。
為無為,
則無不治。
老子는 말했고,
나는 이렇게 들었다.
"자연 만물은
본래보다 현명해지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래서 다툼이 없다.
본래 보다 많은 것을 가지려 애쓰지 않는다.
그래서 그 이상 훔치지도 않는다.
현재의 필요 이상 욕심 내는 걸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어지러울 일도 없다.
마찬가지로
자연 만물의 이치를 통해 道를 깨닫는 사람은,
저절로 마음 비우게되고,
순리(順理)로 배 채워져,
다른 생각 들지 않고,
자연히 몸 건강해져 정신도 맑아지더라.
따로 알고자 하지 않아 마음의 욕심 사라지니,
굳이 안다고 나설 일도 없더라.
꾸며서 이룰 일 없으니 만사가 평안하더라."
*
법정스님은 당신의 글
<홀로 사는 즐거움>에서 이렇게 적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3세기 독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엑하르트'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이렇게 풀이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아무 것도 더 바라지 않고,
아무 것도 더 알려고 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더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지식으로부터의 자유,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神으로 부터도 자유로운 사람만이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
그러고 보면 자연 만물은
욕망, 지식, 소유로 부터 자유롭기에
神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자유롭지 않은 인간은
어떻게 만물 위에 군림했을까?
혹시,
군림했다는 착각 속에서 사는 건 아닐까?
과연 자연 만물이 인간을 우러를까?
아니면 두려워 할까?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측은해 할까?
***
우리의 세상은
인간 사회라는 눈 앞에 펼쳐진
외면 세계가 있고,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저마다의 내면 세계가 있다.
외면 세계가
아무리 억압되고 부자유스럽더라도
우리는 내면 세계를 통하여
그만큼 더 자유로울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유와 부자유의 균형,
삶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욕구와
굳이 필요치 않은 욕망과의 균형,
즉 삶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내면 세계의 자유를
가난한 마음이라 이르고,
이를 통해 얻는 자유로운 세상을
하늘나라라고 이르는지도 모르겠다.
****
새삼스러운 발견.
우리는 내면 세계에서 조차 꾸밀 일은 없다.
꾸밈없는 내면 세계에서
법정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에 가까워지거나,
노자의 道에 가까워 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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