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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를 향해 걷다



얼마 전에 나는 라디오에서 윤초(閏秒)라는 낯선 말을 들었다. 아나운서의 설명에 따르면 작년에 전자시계라는 매우 정확한 시계가 만들어지면서 본래 지구의 자전으로부터 산출하던 시간에 미묘한 착오가 일어난다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한다.

 

본래는 지구가 한 번 자전하는데 스물네 시간이 걸리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때로 오차가 발생하는 것을 발견해 내고 그 차이만큼을 윤초로서 덧붙이게 됐다는 것이었다. 일 초라도 그것이 몇 천 년, 혹은 몇만 년 이상 쌓이면 엄청난 시간이 되겠지만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시간이란 원자시계로 산출해야 하는 것으로, 지구의 시간은 그것에 따라 수정될 수 있는 가짜 시간에 지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원자 시계에 기초한 윤초라는 발상의 바탕에는 지구의 회전이라는 자연의 시간을 인간의 손으로 수정해도 괜찮다고 하는 기술주의가 엿보인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기술사회가 시간조차 지배하게 됐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윤초라는 특수한 시간이 이미 공인되고 있는 것과 같이 시간은 일방적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생각 또한 틀림없는 사실로서 공인되고 있다. 오늘은 내일로 이어지고, 2005년은 2006년으로 이어져서 마침내 22세기에 이른다. 이것을 시간의 불가역성이라 하며 아무도 그것을 거스를 수 없다. 오늘은 내일로 이어지고, 올해는 내년으로 이어지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나도 감히 그것에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하지만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시간의 일방적인 전진성향 속에서 인간에 의한 의식적인 가치 부여, 혹은 조작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의 자전에 따라 하루가 정해지고, 공전에 따라 일 년이 정해진다는 시간의 자연성에서 보면, 시간 그 자체는 다만 돌고 있을 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몇 년이 지나도, 혹은 몇 백 년이 지나도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을 뿐으로 거기에는 시간의 진보는 물론 없다.

 

때가 바뀌어 간다고 하는 자연성에 인간의 의식이 덧보태지며 오늘보다 내일, 금세기보다는 다음 세기는 더 나아가 있지 않으면 안되고, 진보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진보의 가설이 공인되는 것이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보는 진화론은 이 공인된 가설을 학문화한 것이자 원숭이를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아울러 미개 사회를 이 합리주의 산업 문명 사회보다 열등한 것으로 계열화했다는 점에서 결점이 많은 학문이다.

우리들은 진보 혹은 진화라고 하는 말을 지상 절대 가치로 삼고 핵무기와 원자력 발전소로 가득 찬 이 사회를 만들어 왔다.

 

이처럼 시간에 이렇게 두 가지, 지구의 회전에서 유래하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 의식에서 태어나는 인간의 시간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실은 내일을 향해 걸을 수 있는 것처럼 어제를 향해 걸을 수 있다. 우주의 식민지를 향해 걷는 것도 가능하지만 석기 문화를 향해서 걸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시간이 한 방향만으로 흐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시대의 큰 착각이자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와 마찬가지로 과거를 향해서도 흐르고 있는, 항상 지금이라고 하는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천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지상에는 핵무기도 없고 원자력 발전소도 없었다. 우리는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굳이 원자력 발전소 따위가 없어서 전기 에너지는 넘치지 않을지 몰라도 오히려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혹은 돌아가야만 하는 새로운 문명 사회의 약도다.”

 

-야마오 산세이 어제를 향해 걷다중에서-





일본의 야마오 산세이(山尾三省, 1938-2001)는 뜻한 바 있어 도쿄에서의 삶을 접고 큐슈 남단 야쿠섬 자연 속으로 들어가 소신대로 삶을 실천하신 농부이자 시인이었고 구도자이자 행동하는 철학자이기도 했던 분이지요.

 

저는 이분의 책 어제를 향해 걷다를 큐슈 남단 야쿠섬 보다 한참 아래인 필리핀에 반년간 출장 가 체류할 때 주문했었습니다. 절판이 된 관계로 우여곡절 끝에 국내의 인터넷 중고서점을 통해서 말입니다. 보다 더 순수했던 어제로, 문명의 석기시대를 향해 걸어가자고 주창했던 내용의 책을 첨단 문명의 이기인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이용해 구한 것이 이제와 생각해보니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국내에 복귀해 이 책을 읽는 중에 우연히 TV에서 후쿠시마 묵시록 - 일본은 아프다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3년 반 전 동일본 대지진으로 파괴된 후쿠시마 원전에서 유출된 다량의 방사능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일본, 일본인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위의 글을 읽으며 야마오 산세이 님의 말대로 우리가 시간을 거꾸로 돌리지 않더라도 어제로, 과거로, 과거의 그 순수함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은 아직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어제를 향해 걸을 수도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