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老子는 말했고,
나는 이렇게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여 서로 다투지 않게하고,
모두가 꺼려하는 곳에 자연스럽게 머문다.
그래서 道에 가깝다.
낮은 곳에 머물러,
연못이루어 고요하고,
동료끼리 잘 어울려,
부딪쳐도 소리 명징하며,
구석구석 바로 채워,
주어진 일 완수하고,
넘치면 때 맞춰 떠난다.
자리 연연해 다투지 않으니,
허물도 없다."
*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순진무구함도 물과 같다.
99%의 물에 1%의 찻잎을 넣고 茶라 불러도,
물은 내치지 않고 물이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93%의 물에 7%의 알콜을 넣고 酒라 불러도,
물은 받아들이고 물이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茶나 酒가 고귀하다고 해도 대부분은 물이다.
茶나 酒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물없이는 살 수가 없다.
(酒없이 못산다는 사람도 물없이는 살 수가 없다.)
사람들은 善이 무엇인지 다 알지 못하지만,
날 때부터 착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것을 어떤 이는 사랑하는 마음이라 하였고,
어떤 이는 자비심이라 하였고,
어떤 이는 율법의 정수라 하였고,
어떤 이는 계명의 원천이라 하였고,
다른 이는 그 어떤 무엇이라고 하였으니,
그들은 수련을 통해서 비로소
그것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순진무구한 아기의 눈짓과 손짓에서,
그 어떤 수련의 흔적도 나는 찾을 수 없었다.
눈웃음 지으며 손 저어 살며시 쥐는 순진무구함을
눈을 부릅뜨고 움켜 쥐어도 나는 잡을 수 없었다.
사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가치나 판단 기준에서 자유로운
순진무구한 아기로 되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한다면 천진무구한 척
꾸밀 수 있을 지는 혹시 모르겠다.
그러나 꾸미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여러 곳을 두리번거려
다른 무엇이 되려 바라지 않고,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로 머무르기,
그리고 떠나기.
그 어느 곳이든 머물러 있다가 때 맞춰 흘러가는
물이 들려주는 善이요 道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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